FAITH

복음서를 읽는다는 것. (12살 예수님의 '내가 뭘?!' )

자료보는아저씨 2026. 1. 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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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읽는다는 것"

https://philcuc.tistory.com/93

 

마태오 복음의 '가라지' 비유를 읽으면서

"가라지"라는 말 앞에서마태오복음, 그리고 엠마뉘엘 까레르의 과 함께 하는 중이다. 요즘 을 읽고 있다. 얼마전부터 신약으로 넘어왔고, 지금은 그 첫 마태오복음 부분을 읽는다. 그리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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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마태오 복음의 '가라지' 비유를 읽으면서> 가 길어져서 좀 더 적는다.) 

 

가만 보면 복음서를 읽는 일 자체가 가만히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책읽기와는 많이 다르다. 한 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진 않는다. 한 구절을 붙잡고 있다가, 다른 복음서를 보게 되고, 비유 하나를 보다가 또 다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된다. 

 

요즘은 엠마뉘엘 까레르의 <왕국>을 읽는 중이다. (전자책으로 읽고 있으며,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약 60%의 위치를 읽고 있다. 아직 완독 전)

 

정말 그랬을까?

까레르의 눈은 좀 독특하다. (훌륭한 작가이다.)

그는 복음서를 그대로 믿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신약 복음서와 그 시대를 함께 그리는 이 책 <왕국>은 신을 믿었던, 또 믿고자 했던 작가 본인이 신의 언어로 된 텍스트를 다시 사람의 언어로 읽어보려는 시도다.

 

나도 요즘 그런 시선을 배우는 중이다. (배운다기 보다 이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복음서 안의 '자캐오' 이야기.

까레르는 이 이야기는 생생한 (아마도 '사실') 이야기라고 말한다. 

키가 작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세리 자캐오. 

군중 사이에서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간 그 장면.

까레르는 그걸 '진짜 있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 나도 동의한다. 

그런 인물, 그런 상황, 충분히 있었을 수 있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났다는 장면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건 과연 '사실'일까?

아니면 루카가 신학적 의미를 담아, (어떤 의도인지 문학적 맥락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구성해 낸 장면'일까?

까레르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복음서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믿음을 문서화하려는 시도이자, 한 신앙공동체가 꾸리는 문학적 재구성이다."

나 또한 성경, 복음, 그리고 <왕국>을 그런 시선으로 보면서 복음서를 따라 가고자 한다. (더 알고 싶다.) 

 

루카 복음 속 12살 예수, "아버지 집에 있었을 뿐인데!!?"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루카 복음 2장 41-50절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12살 예수가 그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혼자 남게 된 이야기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이 예수가 없어진 것을 하루가 지나 알았고, 급히 되돌아와 회당에서 아이를 찾아낸다. 분명 당황하고 마음조리고 있었을 마리아께서 묻는다. "얘야, 왜 이렇게 했느냐? 우리가 너를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아니?" 

그러자 아이 예수께서 대답한다.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걸 모르셨습니까?

 

이 장면, 매우 많이 압축되어 있다고 느꼈다. 

(아마, 영화<나 홀로 집에>에서 케빈이 가족 여행의 비행기에 타지 않은 걸 알고 깜짝 놀란 케빈의 부모님이 가지는 심정과 이후 벌어지는 소동만큼이나 큰 이야기 거리인데, 몇 줄로 압축하고 있다.) 어쩜 성경 속에서 극도로 정데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실이라면 어땠을까? 

 

하루를 가야 하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며? 소위 '멘붕'이 왔을테고, 당황하였을 것이고, 별별 걱정이 꼬리를 물고 계속 커지고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헤매다 찾았더니 이 아이가 태연하게 '왜요?' 라고 반문한다면? 

"그래, 네가 아버지 집에 있었구나." 하고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부모의 감정은 복잡하였을 것이다. 복음의 근엄한 대사 하나로 대체되거나 형용할 수는 없는 그런 정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에는 이런 절박함, 혼란, 불안, 혹은 그에 따른 '화남' 같은 것들이 쏙 빠져 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명을 인식하는 첫 선언"으로서의 장면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장면이다. 

 

나는 그 장면을 이렇게 다시 보려고 한다. 

복음서의 문장 안에 숨은 사람의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루카가 생략해버린 감정들이나 힌트를 복원하는 것. 이런 것은 예수님의 신성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정말 '사람'으로서, '우리처럼' 사셨다는 것, 그리고 그(!)가 말하려던 것을 더 진실하게 드러내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서에는 쉽게 알 수 없는 이야기들

까레르의 길을 따라, 나도 알고 싶고 묻고 싶다. 

"이건 진짜 있었던 일일까?"

"정말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을까?"

"복음서 기자가 무엇을 보태거나, 덜어내거나, 다시 구성한 것이 있을까?"

이건 믿음을 헤체하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다져지고, 새롭게 형성되는지를 착실하게 따라가 보는 일이다. 아마 그 복음서에 담긴, '문학', '신학', '의도', 그리고 '사람의 흔적'들을 다 들여다 보고 싶을 것이다. 복음서, 아주 단단한 텍스트 같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앞과 뒤, 그리고 다른 복음서와 함께 볼수록 사람으 힌트가 보이는 텍스트일 것이다. 그 힌트 혹은 그 틈이 불편할 수 있지만, 그 틈 더군에 우리가 그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진짜 그랬을까?"

복음서를 읽을 때 드는 이 생각, 이 의문, 

까레르도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복음 한 줄을 하루가 넘게 곱씹으면서 정리하고 글을 썼으니 나와는 다를 것이다.)

의심이 믿음의 반대라기보다는 믿음의 그리자면 혹은 그 그늘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하겠다. 

 

아직 <왕국>을 다 읽지 않았고, 도마복음은 일부만 보았으며, 신약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한 상황이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사건'들을 다시 한 단계 더 밑에서 떠올려보고 생각하고 있다. 빨리 독파하겠다는 생각은 이제 없다. 복음서에 나오는 '믿음', '믿음들', '믿음 이야기'를 천천히, 그리고 그 뒤의 의심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함께 천천히 복음의 길을 따라 가다 멈추기도 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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